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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약진`후의 대기근

johnny70 2008. 5. 22. 14:04
중국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이후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운동은 이른바 ‘대약진’ 후의 대기근이다. 1994년 2월 홍기(紅旗) 출판사에서 출간한 『중화인민공화국 역사기록』 ‘대기근’ 관련 문장에서는 “1959~1961년 비정상적인 사망과 출생 인구의 감소는 대략 4천만 명 정도다. …중국인구가 4천만 명이나 감소했는데 아마도 금세기 최대의 기근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이 대기근을 ‘3년간의 자연재해’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실제로 3년간 기후는 순조로웠으며 큰 홍수나 가뭄, 회오리바람, 해일, 지진, 서리, 추위, 우박, 해충 등 대규모 자연재해는 한 차례도 발생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대기근은 철저한 인재(人災)였다. ‘대약진’ 때 강철을 만든다고 전 인민을 동원하는 바람에 농촌에서는 곡식을 거둘 일손이 없어서 그대로 썩혀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중국 각지에서는 공산당 지도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지역별 벼 생산량 ‘신기록 경쟁’이 불붙었다. 류저우(柳州)지역 공산당위원회 서기 허이란(賀亦然)은 심지어 일방적으로 환장현(環江縣)의 벼 생산량이 한 무(畝)당 무려 13만 근이라는 기사를 조작하였다. 마침 루산(廬山)회의 이후 중국 공산당이 전국적으로 ‘반(反)우경’을 하고 있을 때라 공산당의 일관된 정확성을 관철하기 위하여 전국에서는 허위 보고한 대로 식량을 바쳐야 했다. 결국 농민들의 식량, 종자, 사료까지 몽땅 징발하였다. 그렇게 해도 양이 부족하자 농민들이 식량을 숨겼다고 모함하였다.

허이란은 “류저우 지역에서 설령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더라도 전국 제일을 쟁취해야 한다.”고 했다. 어떤 농민은 집에 있던 곡식을 몽땅 빼앗겨 오줌통에 감춰둔 몇 줌의 곡식밖에 남지 않았다. 환장현 쉰러구(馴樂區) 위원회에서는 농민들에게 식량이 있어도 먹지 못하게 했으며, 심지어 음식을 해먹지 못하도록 ‘불씨를 없애고 솥을 봉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민병(民兵)들이 야간에 순찰하다가 불빛만 보이면 집을 수색하고 사람을 체포하였다. 수많은 농민들은 채소와 나무껍질조차도 감히 익혀 먹지 못했으며 산채로 굶어죽었다.

과거에 대기근이 발생하면 관에서는 죽을 끓여주는 죽청(粥廳)을 설치하여 창고를 개방하고 곡식을 풀어 구휼하였으며, 난민들에게 살길을 찾아 멀리 이주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난민들이 이주하면 ‘공산당의 위신(威信)’이 내려간다며 민병을 파견하여 향촌의 길을 막고는 굶주린 난민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심지어 기아에 시달린 사람들이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서 식량창고의 양식을 꺼내면 총으로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총에 맞아 죽은 난민들은 반혁명분자로 모함하였다.

당시 간쑤(甘肅), 산둥(山東), 허난(河南), 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쓰촨(四川), 광시(廣西) 등 많은 성(省)에서 기아에 굶주린 난민들의 시체가 온 들판에 깔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굶주림에 지친 농민들을 동원하여 ‘대규모 수리(水利)사업’, ‘대규모 강철 제련’ 등 강제노역을 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길에서 쓰러져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다. 나중에는 사람이 죽어도 묻을 기력마저 없었으며 많은 마을에서는 가족이 모두 죽은 폐가(廢家)가 속출하였다.

중국 역사상 기근이 가장 엄중했던 시기에 일찍이 ‘자식을 식량과 바꾼’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중국 공산당이 통치한 시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발생하였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시신을 가르고 삶아서 먹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지역에서 기아를 피해 온 난민을 잡아먹었으며, 심지어 자기 자식까지도 잡아먹었다.

“한 농가에서 마지막에 아버지와 아들, 딸 셋만 남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딸을 문밖으로 내쫓은 후 한참이 지나 딸이 집에 돌아와 보니 남동생이 없어졌다. 솥에는 하얀 기름기 있는 물건이 있었고 솥 옆에는 뼈가 한 무더기 있었다. 며칠 후 아버지는 또 솥에다 물을 붓고는 딸을 불렀다. 딸은 놀라서 문밖으로 도망치면서 울며 애걸하였다. ‘아빠 저를 잡아먹지 마세요. 제가 아빠를 위해 나무 하고 불도 지피는데 저를 잡아먹으면 아빠를 위해 일을 해줄 사람도 사라집니다.”(작가 사칭(沙靑)의 보고 문학 『아득한 대지만(依稀大地灣)』중에서)

이러한 반 인륜적인 비극이 얼마나 많이 발생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무수한 반 인륜적 비극을 만든 죄악의 우두머리 중국 공산당이 인민을 인도하여 자연 재해를 극복했다고 찬송하면서 공산당은 ‘위대하고 광명하며 정확하다.’고 했음을 알고 있다. 1959년 루산회의 때는 인민을 위해 바른 말을 한 펑더화이(彭德懷)가 숙청당했으며 진실을 말한 많은 공산당 간부들도 파직되거나, 감금되고, 심사 당했다. 그리하여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는 더 이상 진실을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이 굶어죽는 진상을 은폐하였다. 심지어 간쑤성의 경우 산시성(陝西省)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식량 지원을 해주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량이 부족하지 않다는 구실로 거절해 버렸다.

이 대기근은 또한 중국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한 차례의 검열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표준에 따른다면 이런 간부들은 모두 합격한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천만 명이 굶어 죽어도 바른 소리를 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인정(人情)이나 천리(天理)도, 그들이 당을 따르는데 있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기근 후 잘못을 저지른 성(省)급 간부들은 형식적인 검토를 거쳐 일을 마무리지었다. 쓰촨에서 몇 백만 명을 굶어 죽인 성위원회 서기 리징취안(李井泉)은 심지어 다시 발탁되어 공산당 서남국(西南局)의 제일 서기로 선임되기도 했다.

출처 : 양안전쟁
글쓴이 : 민진당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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